자아득불래소 경제겁수(自我得佛來所經諸劫數)
무량백천만억 아승지(無量百千萬億阿僧祉)
내가 부처가 된 이후로 지나온 많은 세월은 한량 없는 백천만억 아승지로다.
이 구절은 법화경 여래수량품에 있는 말씀인데 법화경의 골자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내가 성불한 뒤로 얼마만한 세월이 경과했느냐 하면 숫자로써 형용할 수 없는 한없이 많은 세월이 경과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보통으로 봐서 이것은 이해가 잘 안 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인도에 출현해서 성불하여 열반하신 지 지금부터 2천 5백여 년 밖에 안되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부처님 말씀이 자기가 성불한지가 무량백천 아승지 이전이라고 했을까?
어째서 숫자로 헤아릴 수 없는 오랜 옛날부터라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일까?
사실에 있어서 부처님이 2,500년 전에 출현하여 성불하신 것은 방편이고 실지로는 한량없는 무수한 아승지겁 이전에 벌써 성불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바로 알아야 불교에 대한 기본자세, 근본자세를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불교의 목적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성불이다”, 즉 부처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의례 그렇게 말하지만 실제로는 맞지 않는 말씀입니다.
실제 내용은 중생이 본래(本來) 부처(是佛)라는 것입니다.
깨쳤다는 것은 본래 부처라는 것을 깨쳤다는 말일 뿐 중생이 변하여 부처가 된 것이 아닙니다.
그 전에는 자기가 늘 중생인 줄로 알았는데 깨치고 보니 억천만 무량 아승지겁 전부터 본래로 성불해 있더라는 것입니다.
무량 아승지겁 전부터 본래로 성불해 있었는데 다시 무슨 성불을 또 하는 것입니까?
그런데도 “성불한다, 성불한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우리 중생을 지도하기 위한 방편으로 하는 말일 뿐입니다.
부처님이 도를 깨쳤다고 하는 것은 무량 아승지겁 전부터 성불한 본래 모습 그것을 바로 알았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부처님 한 분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닙니다.
일체 중생, 일체 생명, 심지어는 구르는 돌과 서 있는 바위, 유정무정(有情無情) 전체가 무량 아승지겁 전부터 다 성불했다는 그 소식인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계를 “사바세계”라 합니다.
모를 때는 사바세계이지만 알고 보면 이곳은 사바세계가 아니고 저 무량 아승지겁 전부터 이대로가 극락세계입니다.
그래서 불교의 목표는 중생이 변하여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니고, 누구든지 바로 깨쳐서 본래 자기가 무량 아승지겁 전부터 성불했다는 것, 이것을 바로 아는 것입니다.
동시에 온 시방법계가 국토 아닌 곳, 정토 아닌 나라가 없다는 이것을 깨치는 것이 불교의 근본 목표입니다.
다른 종교에서는 “구원”이라는 말을 합니다. “구원을 받는다”, “예수를 믿어 천당 간다”고 합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구원이라는 말이 해당되지 않습니다.
본래 부처인 줄 확실히 알고, 온 시방법계가 본래 불국토며 정토인 줄 알면 그만이지 또 무슨 남에게서 받아야 할 구원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불교에는 근본적인 의미에서 절대로 구원이란 없습니다.
이것이 어느 종교도 따라 올 수 없는 불교의 독특한 입장입니다.
실제 어느 종교, 어느 철학에도 이렇게 말하지 못합니다.
불(佛), 부처란 것은 불생불멸을 이르는 말입니다.
무량 아승지겁 전부터 성불했다고 하는 것은 본래부터 모든 존재가 불생불멸 아닌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물론 동물도, 식물도, 광물도, 심지어 저 허공까지도 불생불멸인 것입니다.
또한 모든 처소 시방법계 전체가 모두 다 불생불멸인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이 즉 정토이며 불국토인 것입니다.
즉 모든 존재가 전부 다 부처고, 모든 처소가 전부 다 정토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어째서 사바세계가 있고 중생이 있는가?
내가 언제나 하는 소리입니다.
아무리 해가 떠서 온 천하를 비추고 환한 대낮이라도 눈 감은 사람은 광명을 못 봅니다.
앉으나 서나 전체가 캄캄할 뿐 광명을 못 봅니다.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의 눈을 뜨고 보면 전체가 광명인 동시에 대낮 그대로입니다.
마음의 눈을 뜨고 우주법계 전체가 광명인 동시에 대낮 그 전체가 불국토 아닌 곳이 없습니다.
마음의 눈만 뜨고 보면!
그러나 이것을 모르고 아직 눈을 뜨지 못한 사람은 “내가 중생이다”, “여기가 사바세계다” 라고 말할 뿐입니다.
근본 병이 어디에 있느냐 하면 눈을 떴나, 눈을 감았나 하는 여기에 있습니다.
눈을 뜨고 보면 전체가 광명이고, 눈을 감고 보면 전체가 다 암흑입니다.
마음의 눈을 뜨고 보면 전체가 다 부처이고 전체가 다 불국토이지만 마음의 눈을 감고 보면 전체가 다 중생이고 전체가 다 사바세계 지옥인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것저것 말할 것 없습니다.
누가 눈감고 캄캄한 암흑세계에 살겠다고 하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누구든지 광명세계에 살고 싶고, 누구든지 부처님 세계에 살고 싶고, 누구든지 정토에 살고 싶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시 바삐 어떻게든 노력하여 마음의 눈만 뜨면 일체 문제가 다 해결됩니다.
가고 오고 할 것이 없습니다.
천당에 가니 극락세계에 가니 하는 것은 모두 헛된 소리입니다.
어떻게든 노력해서 마음의 눈만 뜨면 일체 문제가 다 해결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내가 아승지겁 전부터 성불했더라, 본래 부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인간의 근본존재는 무량 아승지겁 전부터 성불하여 무량 아승지겁이 다하도록 무량불사를 하는 그런 큰 존재입니다.
다만 병이 어느 곳에 있느냐, 눈을 뜨지 못하여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우리가 눈을 뜨겠느냐 이것입니다.
“스님도 딱하시네. 내 눈은 멀쩡한데 내가 기둥이라도 들이받았는가. 왜 우리 보고 자꾸만 눈 감았다 눈 감았다 하시는고?” 이렇게 말할지 모르겠습니다만, 그 껍데기 눈 가지고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아무리 한밤중에 바늘귀를 볼 수 있다고 해도 그런 눈 가지고는 소용이 없습니다. 그런 눈은 안 통합니다.
속의 눈, 마음의 눈, 마음 눈을 떠야 하는 것입니다. 명경에 끼인 때를 벗겨야 합니다.
명경의 때를 다 닦아내어 마음의 눈을 뜨고 보면 해가 대명중천(大明中天)하여 시방세계를 고루 비추고 있는 것이, 맑고 맑은 거울에 고요하게 그대로 환하게 드러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거울의 때를 벗기고 우리가 마음의 눈을 뜰 수 있는가?
가장 쉬운 방법이며 제일 빠른 방법이 참선입니다.
화두를 배워서 부지런히 부지런히 참구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화두를 바로 깨칠 것 같으면 마음의 눈을 안 뜰래야 안 뜰 수 없습니다.
마음의 눈이 번쩍 뜨이고 맙니다.
일초직입 여래지(一超直入 如來地), 한 번 뛰어 부처지 위에 들어간다고, 한 번 훌쩍 뛰면 눈 다 떠 버린단 말입니다.
그래서 제일 쉬운 방법이 참선하는 방법입니다.
그 외에도 방법이 또 있습니다.
우리 마음의 눈을 무엇이 가리고 있어서 캄캄하게 되었는가?
그 원인, 마음 눈이 어두워지는 원인이 있으니 그것을 제거하면 될 것 아닙니까?
불교에서는 그것을 탐, 진, 치, 삼독이라고 합니다. 욕심내고, 성내고 어리석은 이 삼독이 마음의 눈을 가려서 본래 부처이고 본래 불국토인 여기에서 중생이니, 사바세계니, 지옥을 가느니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마음 눈을 가린 삼독, 삼독만 완전히 제거해 버리면 마음의 눈은 저절로 안 밝아질래야 안 밝아질 수 없습니다.
그 삼독 중에서도 무엇이 가장 근본이냐 하면 탐욕입니다.
탐욕! 탐내는 마음이 근본이 되어서 성내는 마음도 생기고 어리석은 마음도 생기는 것입니다.
탐욕만 근본적으로 제거해 버리면 마음의 눈은 자연적으로 뜨이게 되는 것입니다.
탐욕은 어떻게 하여 생겼는가? “나”라는 것 때문에 생겼습니다.
나! 남이야 죽든가 말든가 알 턱이 있나, 어떻게든 나만 좀 잘 살자 나만 하는 데에서 모든 욕심이 다 생기는 것입니다.
“나”라는 것이 중심이 되어서 자꾸 남을 해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마음의 눈은 영영 어두워집니다. 캄캄하게 자꾸 더 어두워집니다.
그런 욕심을 버리고 마음 눈을 밝히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나”라는 것, 나라는 욕심을 버리고 “남”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남을 위해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누구나 무엇을 생각하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자나깨나 나뿐 아닙니까?
그 생각을 완전히 거꾸로 해서 자나깨나 남의 생각 남의 걱정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행동의 기준을 남을 위해 사는 데에 둡니다.
남 도우는 데에 기준을 둔단 말입니다.
그러면 자연히 삼독이 녹아지는 동시에 마음의 눈이 자꾸자꾸 밝아집니다.
그리하여 탐, 진, 치, 삼독이 완전히 다 녹아버리면 눈을 가리고 있던 것이 다 없어져 버리는데 눈이 안보일 리 있습니까?
탐, 진, 치, 삼독이 다 녹아버리는 데에 가서는 눈이 완전히 뜨여서 저 밝은 광명을 환히 볼 수 있고, 과거 무량 아승지겁부터 내가 부처라는 것을 알 수 있는 동시에, 시방세계가 전부 불국토 아닌 곳이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미래겁이 다하도록 자유자재한 대해탈의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누가 “어떤 것이 불교입니까?” 하고 물으면 이렇게 답합니다.
“세상과 거꾸로 사는 것이 불교다.”
세상은 전부 내가 중심이 되어서 나를 위해 남을 해치려고 하는 것이지만 불교는 “나”라는 것을 완전히 내버리고 남을 위해서만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 세상과는 거꾸로 사는 것이 불교입니다. 그렇게 되면 당장에는 남을 위하다가 내가 배가 고파 죽을 것 같지만, 설사 남을 위하다가 배가 고파 죽는다고 해도 남을 위해서 노력한 그것이 근본이 되어서 내 마음이 밝아지는 것입니다.
밝아지는 동시에 무슨 큰 이득이 오느냐 하면 내가 본래 부처라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되는 것입니다.
본래 부처라는 것을!
자기는 굶어 죽더라도 남을 도와주라고 하면 “스님도 참 답답하시네. 자신부터 한번 굶어 보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70평생을 산다고 해도, 100살을 산다고 해도 잠깐 동안입니다.
설사 100살을 살면서 지구 땅덩어리의 온 재산을 전부 내 살림살이로 만든다고 해 봅시다.
부처님은 무량 아승지겁 전부터 성불해서 또 무량 아승지겁이 다하도록 온 시방법계를 내 집으로 삼고 내 살림살이로 삼았는데 그 많은 살림살이를 어떻게 계산하겠습니까?
인생 100년 생활이라는 것이 아무리 부귀영화를 하고 잘 산다고 해도, 미래겁이 다하도록 시방법계, 시방불토에서 무애자재한 그런 대생활을 한 그것에 비교한다면 이것은 티끌 하나도 안 됩니다.
조그마한 먼지 하나도 안됩니다. 내용을 보면 10원짜리도 안됩니다.
그러나 10원짜리도 안되는 이 인생을 완전히 포기해서 남을 위해서만 살고 어떻게든 남을 위해서만 노력합니다.
그러면 저 무량 아승지겁, 억천만겁 전부터 성불해 있는 그 나라에 돌아가고, 그 나를 되찾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에는 10원짜리 나를 희생하여 여러 억천만원이 넘는 참나를 되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괜찮은 장사가 아닙니까.
장사를 하려면 큼직한 장사를 해야 합니다. 내가 중심이 되어 사는 것은 공연히 10원, 20원 가지고 죽니사니 칼부림을 하는 그런 식 아닙니까?
아주 먼 옛날 부처님께서는 배고픈 호랑이에게 몸을 잡아먹히셨습니다. 몸뚱이까지 잡아먹히셨으니 말할 것이 없을 정도입니다.
이것은 무엇이냐 하면 배고픈 호랑이를 위한 것도 있었지만 그 내용에는 큰 욕심, 큰 욕심이 있는 것입니다.
물거품 같은 몸뚱이 하나를 턱 버리면 그와 동시에 시방법계 큰 불국토에서 미래겁이 다하도록 자유자재한 대해탈을 성취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출가하신 것도 그런 것입니다.
나중에 크면 임금이 될 것이지만 이것도 가져봐야 별 것 아닙니다.
서푼 어치의 값도 안 되는 줄 알고 왕위도 헌신짝같이 차버리고 큰 돈벌이를 한 것 아닙니까?
근래에 와서 순치황제 같은 분은 만주에 나와서 1년 동안 전쟁을 하여 대청제국을 건설한 분입니다.
이것은 중국 역사상 가장 큰 나라입니다.
중국 본토 이외에도 남북만주, 내외몽고, 티벳, 인도지나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한 것입니다.
그래놓고 가만히 생각해 보니 참으로 눈을 떠서 미래겁이 다하도록 해탈도를 성취하는 것에 비하면, 이것은 아이들 장난도 아니고 10원짜리 가치도 안되는 것임을 알고 대청제국을 헌신짝처럼 팽개쳐 버리고 그만 도망을 가 버렸습니다.
금산사라는 절에 가서 다른 것도 아니고 나무하고 아궁이에 불이나 때는 부목이 되었습니다.
대청제국을 건설한 만고의 대영웅 순치황제 같은 사람이 절에 가서 공부하기 위해 나무해 주고 스님네 방에 불이나 때 주고, 이렇게 되면 그 사람은 공부를 성취 안할래야 안 할 수 없습니다.
순치황제가 출가할 때, “나는 본시 서방의 걸식하며 수도하는 수도승이었는데, 어찌하여 만승천자로 타락하였는고?(我本西方納子 緣何流落帝王家)”하고 탄식하였습니다. 만승천자의 부귀영화를 가장 큰 타락으로 보고 만승천자의 보위를 헌신짝같이 차 버린 것입니다.
이것도 생각해 보면 욕심이 커서 그렇습니다.
대청제국이란 그것은 10원짜리도 못되고, 참으로 눈을 바로 뜨고 보면 시방법계에서 자유자재하게 생활할 터인데 이보다 더 큰 재산이 어디 있겠습니까?
지나간 이야기를 한 가지 하겠습니다.
6·25사변 때 서울대학교에서 교수하던 문박사라고 하는 이가 나를 찾아와서 하는 말입니다.
“스님네는 어째서 개인주의만 합니까? 부모형제 다 버리고 사회와 국가도 다 버리고 산중에서 참선한다고 가만히 앉아 있으니 혼자만 좋으려고 하는 그것이 개인주의 아니고 무엇입니까?”
“그런데 내가 볼 때는 스님네가 개인주의 아니고 당신이 바로 개인주의야!”
“어째서 그렇습니까? 저는 사회에 살면서 부모형제를 돌보고 있는데, 어째서 제가 개인주의입니까?”
“한 가지 물어 보겠는데, 당신 여태 50평생을 살아오면서 내 부모 내 처자 이외에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본 적 있는지 양심대로 말해 보시오.”
“참으로 순수하게 남을 위해 일해 본 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스님네가 부모형제 버리고 떠난 것은 작은 가족을 버리고 큰 가족을 위해 살기 위한 것이야. 내 부모 내 형제 이것은 작은 가족이야. 이것을 버리고 떠나는 그 목적이 어디에 있느냐 하면 모든 중생을 평등하게 보기 때문이야. 그러니까 내 손발을 묶는 처자권속이라고 하는 쇠사슬을 끊어버리고 오직 큰 가족인 일체 중생을 위해서 사는 것이 불교의 근본이야! 내 부모 내 처자 이외에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당신이야말로 철두철미한 개인주의가 아닌가?”
“스님 해석이 퍽 보편적이십니다.”
“아니야, 이것은 내가 만들어 낸 말이 아니고 해인사의 팔만 대장경판에 모두 그렇게 쓰여 있어. ‘남을 위해서 살아라’하고. 보살의 육도만행, 육바라밀의 처음이 무엇인고 하니 베푸는 것이야. 정신적으로 물질적으로 남을 도우는 것, 그것이 바로 보시(布施)야! 팔만대장경 전체가 남을 위해서 살아라 하는 것이야.”
“…….”
“그러니 승려가 출가하는 것은 나 혼자 편안하게 좋으려고 그러는 것이 아니고, 더 크고 소중한 것을 위해 작은 것을 버릴 뿐이야. 그래서 결국에는 무소유(無所有)가 되어 마음의 눈을 뜨고 일체 중생을 품 안에 안을 수 있게 되는 것이야. 우리가 마음의 눈을 뜨려면 반드시 탐내는 마음, 이것을 버려야 하는데, 탐욕을 버리려면 `나만을 위해서, 나만을 위해서' 하는 이 생각을 먼저 버려야 하지.”
전에도 이야기하지 않았습니까?
불공이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 앞에 갖다 놓고 절하고 복 비는 것이 불공이 아니고 순수한 마음으로 남을 도우는 것이 불공이라고.
부처님께서 보현행원품(普賢行願品)에 아주 간곡하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당신 앞에 갖다 놓는 것보다도 중생을 잠깐 동안이라도 도와줄 것 같으면 그것이 자기 앞에 갖다 놓는 것보다도 여러 억 천만 배 비교할 수 없는 공덕이라고.
- 성철 스님 法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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