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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이 된 남자

Chorl.Jeong 2010. 6. 1. 12:51


제국주의가 판치던 시대, 조선을 합병하고 만주를 휩쓸며 대단한 기세를 보여준 일본.

하지만 대단한 기세를 보여주던 일본도 만주의 국경에서 지금까지와는 다른 상대를 만나게된다.

바로 불곰. 소련이었다.

 

1939년 태평양 전쟁 직전, 소련과 일본이 부딪힌 만주 국경분쟁에서 양국의 군대는 전투를 치뤘고

일본은 수많은 사상자와 포로를 남기고 후퇴하게 된다.

 

그때 조선에서 17살이라는 어린나이에 강제로 징집당해 일본군에 복무하던 한 조선인 청년도 포로로 남겨졌고,

소련은 이 포로들을 자국군에 편입시켜 소련군으로 교육시키게 된다.

이 조선인 청년도 낯설고 추운 나라에서 말 그대로 오직 살아남기위해 소련군이 되는 길을 택했고,

이 청년은 소련 극동군 부대 소속으로 복무한다.

 

시간은 다시 흘러 유럽에서는 2차 대전이 터졌고, 독일은 전 유럽을 휩쓸며


최후의 대빵 영국과 전세계의 운명을 걸고 한 판 승부를 벌이게 된다.



그리고 1941년 히틀러는 그 동안의 동맹인 소련을 향해 칼날을 들이대고

독일과 소련은 운명을 건 치열한 전쟁을 시작한다. 초반의 전쟁은 독일 우세였다.

모스크바 바로 앞까지 밀고들어온 독일군의 힘에 소련은 무너지기 직전이었다.

하지만 어머니 러시아의 수호신, 동장군의 위세에 독일군은 멈출 수 밖에 없었고

소련은 극동지방의 군대까지 동원해서 모스크바를 지키기 위해 맹렬하게 반격한다.




치열했던 모스크바 공방전이 끝나고 독일군은 모스크바를 포기하고 물러나게 되지만

소련군 역시 무턱댄 돌격으로 어마어마한 희생자와 포로가 발생하게된다.

조선에서 태어나 일본에게 징집당해서 소련에게 포로로 잡혀 소련군이 되었던 조선인 청년.

그는 이 지옥같은 전투에서도 살아남는다. 하지만 이번에도 독일군에게 포로로 잡히게 되고.

원래 타민족을 받아들이지 않는 독일군이었지만 소련과의 전투로 예상했던 것보다 손실이 커지자

독일군은 소련군 포로로 만들어진 부대를 창설하고 이 부대를 서부전선 방어에 사용한다.

조선인 청년은 다시 독일군이 되어 프랑스로 건너가게 된다.

 그가 처음으로 남긴 사진. 독일군 복무시절. 1942년 프랑스.



그리고 일순간의 평화.

하지만 1944년이 되면서 아프리카에서 패배한 사막의 여우 롬멜이 서부 유럽 방어사령관으로 취임해 오고

그는 영국과 미국의 대규모 상륙작전을 막기위해 대서양 방벽을 건설한다.

이제 23살이 된 조선인 청년은 이 방어선을 건설하는데 동원되었고 곧 방어선에 배치된다.

 

1944년 6월 6일. 연합군은 지상최대의 작전을 펼친다.

노르망디로 대규모의 상륙함대가 밀어닥치고 하늘을 새카맣게 메운 수송기에서는

연합군의 공수부대가 끝없이 떨어져 내렸다.

노르망디의 독일군 방어선 후방에 강하한 미군의 101 공수사단은 당황한 독일군의 저항을 분쇄하고

독일군 방어선 후방을 들이쳤다.

 

작전 다음날인 1944년 6월 7일.

101 공수사단 소속 브루어라는 병사는 독일군 군복을 입고있는 4명의 독일군을 생포했는데

이들은 처음 들어본 언어로 무언가를 계속 말하고 있었다.

 

그들은 곧 연합군에게 포로로 이송되었고 조사 결과 한국인이라는 어처구니없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이들은 1945년까지 포로수용소에서 생활하다 종전 이후 한국으로 귀향조치 되었다.

 

일본군에서 소련군으로 다시 독일군이 되었다가

연합군의 포로가 된 이 조선인 청년의 기구한 운명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드디어 군복을 벗은 그에게 운명은 5년 간의 짧은 휴식만을 주었을 뿐이었고

1950년 6월 25일, 한반도는 다시 북한과 남한으로 나뉘어 치열한 전쟁을 치른다.

 

그는 고향인 황해도 해주에서 북한군에 입대했고, 수많은 전쟁에 참전한 경력이 인정되어 장교로 복무한다.

특히 많은 포로생활과 각국의 교화작업을 거친 그의 특이한 경험을 살리기 위해

그는 심리전 부대에 소속되어 활동하게 된다.

 

1950년 8월 치열했던 낙동강 공방전이 벌어지던 그 때,

그는 경주지구에서 공격을 담당한 북한군 제 6사단에 배속되어 있었고 그 역시 공격에 참여한다.

하지만 공격은 학도병까지 동원한 국군의 처절한 방어로 실패하게 되고,

미군의 퇴로차단 작전에 의해서 그의 부대는 고립되어 항복을 선언한다.

 

또 다시 네번째로 포로가 된 그는 공산군이 수용되어 있던 거제도 수용소로 이송되었고

그곳에서 1953년까지 지내다가 종전을 맞이한다. 판문점에서 열린 포로 교환식에서 그는 북한을 선택했고

북한으로 돌아가 북한군 심리전 부대에서 계속 복무하며 경력을 쌓아나간다.

그야말로 현대사의 폭풍같은 흐름을 모두 겪은 그에게 마지막 전쟁은 다가오고 있었다.

 

1969년 베트남에서 발발한 베트남과 미국의 전쟁에서 공산주의 국가들은 베트남을 지원했다.

소련은 전투기와 각종 무기를, 중국 역시 무기와 병력을 일부 지원했고,

북한의 김일성도 미그기 한 개 대대와 심리전 부대를 파견한다.

 

그는 심리전 부대의 대장으로 베트남으로 파견되어 베트남전에 참전한 한국군을 상대로 심리전을 펼쳤고,

또한 포로로 잡혀온 국군 병사들을 회유하여 북한으로 보내는 임무를 수행했다.

 

베트남 당시 파견된 북한군과 호치민의 사진. 가운데 호치민의 오른쪽에 앉은 사람.



정글에서 벌어진 지옥같은 전쟁이었지만 그는 자신의 임무를 훌륭하게 수행했고,

경험많은 이 군인은 북베트남의 지도자인 호치민에게 대단한 신임을 얻었다.

호치민은 북한의 김일성에게 이 뛰어나고 경험많은 군인을

앞으로 건설해나가야할 베트남군에 복무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고,

공산주의가 승리할 것이라는 희망에 젖어있던 김일성은 그 요청을 수락,

그는 소박하지만 강인한 베트남인들 사이에서 살아가기로 한다.

 

평화의 시간은 흘렀고 김영삼 시대에 와서 한국이 베트남과 수교를 하고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 시대에 교류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베트남에서 사랑받는 특이한 노 장군에 대한 이야기가 조용히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그의 이야기는 세상에 빛을 보게된다.

베트남군 예비역 대장.  현 군사고문.  한국명 김철민.  베트남명 응옌 치엔민.

 

현대사를 관통하는 거대한 전쟁을 모두 경험하며 5개 나라의 군인으로 복무한 이력을 가진 남자의 이야기.

도도히 흐르는 역사의 물결을 조용히, 하지만 강인하게 헤쳐나간

작은 체격을 가진 이 남자의 소설같은 이야기는 거짓말이다.